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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월-금계

오솔길을 마음에 품다
언제부터인지 밑을 보며 걷는 것이 익숙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머리를 들고 주변을 살피게 되고 시선을 따라 마음도 움직인다.
그리고 도착이 목적이 아닌 걷는 것이 목적인 길의 뜻에 순응한다.
시골길에서는 털털대는 경운기 소리 자체가 경적이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경운기에 몰래 타기 놀이를 하면 모른 척 속도를 줄여주던 이웃집 아저씨가 생각난다.
시골 길은 가슴 깊이 묻어둔 아이의 마음을 꺼내준다.
추수를 앞둔 황금물결과 여름 내내 자신의 품속에 어린 모를 가두며 성실하게 농부를 도왔던 물길이 나란히 함께 길을 간다.
길은 무언가를 구분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백색의 벽에 그려진 소박한 색의 꽃들이 반갑게 맞아준다.
그런데 내 마음 속에 떠오르는 것은 꽃을 보며 해맑게 웃는 아이들의 얼굴. 잠시나마 아이들의 미소를 얼굴에 띄워본다.
남의 눈을 피해 담 밑으로 들어온 "달밤의 연인". 담은 출입을 막기도 하지만 때로는 만남을 주선하기도 한다.
시대를 넘는 연인의 수줍은 모습이 내게도 수줍었던 추억을 떠오르게 한다.
나른한 피곤함이 다리에 느껴질 무렵, 향긋한 송향과 함께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정겹게 조잘대는 물소리가 들린다.
구비를 돌기도 전에 마음은 벌써 수성대의 차가운 물줄기를 그려본다.
휴식이 없는 여행은 메마르다. 다리를 쉬게 하고 머리를 쉬게 한다.
잠시지만 그저 아무런 생각 없이 흐르는 물과 푸른 솔가지와 든든한 바위에 몸을 맡긴다.
배넘이재는 산 너머 장에 내다 팔 보리쌀 한 말, 우리아이 꼬까신과 바꾸려고 밤새 엮은 산나물을 머리에 인 아버지와 어머니의 발길이 만든 길이다.
세월을 뛰어넘는 마음을 생각하며 의미 있는 발길을 꾹꾹 딛는다.
때로는 침묵의 산이 화려한 언변의 사람보다 더 위로가 된다.
초록의 상쾌함과 적당한 고통으로 내 몸을 깨워주는 산길은 재 너머에서 나를 기다리는 정겨운 풍경에 대한 희망을 품게 한다.
아름다운 풍경을 의미 있게 하는 것은 결국 사람.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하게 감싼 산들과 생긴 대로 뻗어나간 구불구불한 길들이 순응하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 마음이 더욱 따뜻해진다.
수백 년 동안 마을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겪었을 당산나무는 그 사연만큼이나 큰 가슴을 가지고 있다.
그저 말없이 당산나무의 시선을 따르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이미 산골의 전설을 떠올린다.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중심에 가만히 나를 내려놓는다.
그러기 위해 "나는 작다"라고 말해야 한다. 행복은 조화를 이룰 때 만들어진다고 "작은 마을"이 말해준다.
어머니는 널찍한 밭을 볼 때면 "많이 고생했겠다"라는 말을 앞세우셨었다.
풍성한 결과만을 보지 않고 그 속에 들어간 정성에 감사하는 어머니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극상림은 수많은 나무들이 어울리고 투쟁하며 최적의 환경을 만든 결과이다.
숨어있는 생명력, 움직이지 않는 역동성 앞에서는 고개 꺾어져라 쳐다볼 뿐 어떤 말도 필요 없다.
하늘을 향해 뻗고 구부러지고 꺾어진 서어나무의 웅장한 가지.
수백 년 전 한 알의 씨앗이 이제 하늘을 받치고 있다. 하늘이 눈이 부신 탓일까?
알 수 없는 촉촉함이 눈에 차오른다.
살아가겠다고, 너를 억지로 이기지 않겠다고, 그저 나를 받아달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받아 산이 인간에게 허리를 기꺼이 내주었다.
산허리에 자리잡은 다랭이논에는 거친 농부의 손자국들이 숨어있다.
억지 부리고, 왜 안 되냐고, 미련을 품고 살아왔다.
다랭이논은 수 많은 돌을 땀으로 모아 산이 준 모양 그대로 만든 수확의 공간. 농부의 투박한 솜씨가 삶의 지표를 알려준다.
아홉 구비 등구재를 오르는 발걸음이 나도 모르게 빨라진다.
걷는 과정이 곧 목적이었던 것을 망각하고 결과만을 빨리 보려던 마음이 부끄러워 그제야 걸음을 멈춘다.
산길을 내려오는가 싶더니 다시 언덕이다.
구불구불하다는 것은 앞 뒤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위 아래로도 있다. "풋!" 알 수 없는 실소가 나왔다.
장난스러운 산의 시선이 저 멀리서 느껴진다.
누군가의 배려로 놓인 돌계단, 산길에서 언제 이어진 지 모르는 호젓한 마을 길.
산골 마을의 삶은 이 길과 같지 않을까? 누군가의 배려와 경계는 있지만 마음만은 열린 삶을 살고 싶다.
얌전하게 걸음을 떼어놓아야만 온전하게 통행을 허락하는 산길.
수 많은 사람들의 웃음과, 눈물과, 상념을 함께 한 그 길에 내 발자국을 지금도 깊게 새겨졌을까?
그 길을 마음에 품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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